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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성령강림후 2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0. 20. 10:40
성서일과
- 1독서 | 욥기 42:1~6,10~17 혹은 예레미야 31:7~9
- 응송 | 시편 34:1~8,(19~22) 혹은 126
- 2독서 | 히브리서 7:23~28
- 3독서 | 마가복음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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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소원 세가지만 들어주겠다’고 하신다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세번 뿐’이라는 제한은 마치 어제가 지나고 오늘이 온 것처럼, ‘내일’ 또한 당연하고 마땅하다 여기던 우리 기대를 깨트리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깊은 고민이 시작될 겁니다. 그런가 하면 단박에 답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곧장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마지막 하나로 붙들어야 할 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평상시에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답을 말한다는 것도 능사는 아닌 것은 섣불리 터무니 없고 무가치한 것을 답으로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지금, 여러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답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마지막으로 행하셨던 기적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눈 멀었던 이가 눈을 뜨게 되는 사건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하셨던 첫 기적이 창조주로서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셨던 것이었다면, ‘눈 먼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오늘 보여주신 이적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 전체가 지향하고 있던 방향성을 가르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로 향하시던 길, 주님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 둘러쌓여 계셨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보게 되었던 수 많은 이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로서 주님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었던 탓입니다. 새로운 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주님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더 이상의 밥이 필요없고, 권력자들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시덥잖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의 곁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병에 걸린 이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희미한 소망의 불 빛조차 꺼져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없이 주님이 무엇을 보여주실지, 무엇을 해주실지를 기대하 따르고 있습니다. 그때 모두의 기대를 깨트리듯 처절한 절규가 터져나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2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는 혁명가나 정치가, 전사가 아닌 헤어진 겉옷을 걸친 눈먼 거지 한명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놀란 사람들의 면박이 쏟아집니다. 본문에는 ‘잠잠하라’ 꾸짖었다고 씌여있지만, 실은 대부분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들이었을 겁니다. 그가 늘 들어왔던 말입니다. 거지인데다 앞도 보지 못했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들은 늘 이런 꾸짖음과 면박뿐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천덕꾸러기 일 뿐입니다. 복지국가를 향하고 있다는 지금에 태어났어도 서러웠을 그의 형편은,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그 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아련한 연민을 더 깊게 만듭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존경’, ‘명예’라는 의미를 지닌 ‘디메오’라는 이름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대단히 명망있고 존경받는 유력가였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그의 아들이 하루 아침에 눈이 멀은 것을 보면, 겉으로는 저리 보여도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지었을게야’ 마치 목사의 자녀나 가족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죄를 지었다거나 ‘영력’이 없어서라고 탓하는 군중들의 수군거림처럼 말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마가가 사용한 ‘아나블레포’(ἀναβλέπω)’ 라는 말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보면,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니라 종말의 날처럼 찾아온 어느날 그가 빛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눈이 멀게 된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일생에 유일한 오점이 되었을 겁니다. 그가 함께 있는 한 그의 가정은 부정하다는 딱지를 뗄 수가 없었기에, 가정에 찾아온 불행을 막기 위해서 바디매오는 내쳐졌습니다. 그리곤 누구라도 알아볼까 두려웠던 탓에, 식구들 중 어느 하나 손을 내밀거나 돌봐주지도 않습니다. 헤어진 겉옷 한벌 걸치고 있는 거지였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도 차별받는 서러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애인이라 꺼려하고 부정하다 혐오합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리 없는 짓궃은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돌맹이를 던지고 조롱하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 함께 하면 부담이 되고, 짐이 되는 존재, 그가 세상에서 들어왔던 모든 소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흙바닥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어느날, 그의 귀에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님께서 곳곳마다 이적을 베푸셨던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옵니다. 바로 그가 이곳을 지나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디매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3
군중들의 웅성임을 길안내 삼아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보지만, 오늘도 그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꾸지람의 소리들 뿐입니다.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쳐내고 윽박지릅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그도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곁에서 기적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계속해서 헛발질만 하던 제자들과 달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을 향한 확신에 가득찬 그의 외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군중사이에서 울려퍼집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절규이기도 했지만, 대단히 불온하고 위험천만한 외침이었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란 로마와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구원자로 받아들여집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를 전복시킬 반역의 우두머리인 셈입니다.
당시는 모든 피정복지의 경제, 문화, 정치적 자치권까지 보장해 주되, 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반역에는 가차없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았던 정복국가 로마의 허울 좋은 ‘평화’가 숨을 죄어오던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로마를 전복시킬 것으로 예언된 ‘다윗의 자손’이라는 바디매오의 외침은, 절대적으로 금기된 것입니다. 자칫 그곳에 모인, 아니 여리고 성 전체가 불순한 제국의 반역자들로 몰려 학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바디매오의 힘찬 외침안에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결연함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무심히 지나쳐가시던 주님의 걸음이 마침내 멈추어 세워졌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가 주님의 응답에 어긋남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오셨던 주님의 귀에, 자기 백성의 사뭇친 울부짖음이 파고들기 시작했을 때,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이 주님의 걸음을 멈춰세웠던 것입니다. 드디어 바디매오가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헤어진 겉옷, 여기저기 상한 몸, 보지 못해 움푹 패어들어간 눈, 주님의 마음이 아파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49)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물으시니 무엇이라도 말만하면 됩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바디매오의 입을 향하였을 때, 그가 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51)
여기 저기에서 어리석음을 탓하는 듯한 탄식과 한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동냥이나 적선, 그도 아니면 평생 걱정 없이 살만큼의 먹거리 쯤을 요구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시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허락한 단 한번의 소원에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다른 바람이 있지는 않을까요? 평생 걱정 없이 쓰고 남을 재물이라던가,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이라던가, 아니면 남부럽지 안을 만큼의 ‘성공’은 아닐까요?
바로 지난 주 말씀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이 물음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구했던 것은 주님의 왼편과 오른편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구했던 것은 오히려 돈도, 집도 아닌 ‘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돈도, 집도, 건강도 모두 상대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못 가졌다 싶지만 또 한편에서는 누구보다 많이 가졌을 수도 있으니, 이런 것들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바라고 구해야할 한가지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치 못해 주님을 뒤로 하며 떠나갔던 부자청년이나 눈을 뜨고는 있지만 정작 헛발질 하고마는 제자들과 달리, 한치 앞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디매오는 주님의 걸음을 멈춰세워야할 만한 무엇이 있음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4
주님을 향한 바디매오의 갈급함과 확신은 주님을 향한 한 마디안에 담겨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교회 전통은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의 고백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이 고백이야 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주님을 정확히 꿰뚫어본 고백입니다.
무엇을 그리고 얼마나 가지게 된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들이 허무와 결핍과 절망의 이유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많이 움켜쥐면 쥘 수록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고 파산하게 된다는 것을 제 삶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키리에’로 시작하는 고백안에는, 결국은 죽음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자기 실존에 대한 처절한 성찰이 담겨있습니다.
자기 보다 높은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여기를 뛰어넘는 차원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을 간구할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이 고백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우리는 끊임없이 독을 쏟아 내듯 ‘왜 나만?’이라고 하는 원망과 현실의 부정, 절망과 체념을 뱉어내고, 삶은 온통 고통과 파괴의 아픔만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 거리다 힘이 빠져버리는 것처럼, 삶을 붙들기 위한 애꿏은 몸부림마져 힘에 부치게 될 즈음에 이르러서야, 처절하게 무능하고, 무력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면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삶이 힘겹고, 왜 이렇게 서럽고,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드디어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요즘 한창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오징어게임’에서 ‘오일남’역을 맡았던 올해 77세 ‘오영수’배우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볼 것을 보고, 생각할 것을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진 삶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지내고 익어질 때만 가능한 것임을 보게 해줍니다.
‘젊었을 때는 꽃이 핀 것을 보면 꺾어 오곤 했는데,
내 나이쯤 되고 보면 두고 오고 보고 싶으면 찾아가게 됩디다’모든 것이 주어졌던 것 뿐이었으니 애당초 ‘내것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고,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뼈져리게 자각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서 아무런 자격과 공로가 없는 빈 손을 하나님께 내밀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입니다.
5
만일 여전히 돈이 주인 노릇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권세이며, 영원한 삶이나 행복이 ‘소유’에 달려있다고 보인다면 우리는 여전히 눈이 먼 사람들일 뿐입니다. 과연 이런 우리가 주님이 부르신 길을 따를 수 있고, 주님이 맡기신 교회를 감당할 수 있을런지를 되물을 때마다 오히려 절망에 얼굴을 묻고 돌아섰던 부자청년이 부럽기도 합니다. 차마 돌아설 수 없으나 여전히 한 걸음의 진보도 이루지 못한 채, 깨어진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따라 걷고 있는 민망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를 때는 나자신의 의로움이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닌, 온전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야만 합니다. 주님만이 당신을 영생을 길어올릴 길삼아 살아가는 이들을 예외없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구원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5)
바디매오는 우리의 걸음이 어디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침내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육신의 눈이란 곧 다시 어두워질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던 그는 그곳에 멈추어 설 수 없습니다. 곧장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겉옷은 담보로 잡아도 반드시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오경인 출애굽기에서 경계(출애굽기 22:25)하는 것처럼, 겉옷은 일교차가 큰 유대 땅에서 가난한 이들이 매서운 바람을 피하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의지하던 생명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보니, ‘거지’라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뿐인 더 없이 거추장스러운 옷일 뿐입니다. 주님안에서 생명을 발견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 예수의 초대를 받은 제자라면 기쁨으로 걸어가게 되는 길이 그에게 열린 겁니다. 제 손에 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결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갈 수 밖에 없던 부자 청년의 안타까웠던 모습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바디매오가 주님의 말씀보다 먼저 들어야 했던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윽박에 풀죽어 있던 그를 일으켜 세웠던 소리, 빛을 찾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들어냈던 소리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 49
참으로 따듯한 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환대의 언어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짧은 이 한마디가 바디매오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주님께 수용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만일 그를 초대하는 환대의 음성이 없었다면, 그는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한 채 평생 어둠속에 사로잡히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고 일어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에바다’ 눈을 뜨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렇게 살아가다가 혹여 보지 못하는 누군가를 마주하게 될 때, 그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십시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하고 완전한 길이 되어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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