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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7 성령강림후 2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0. 12. 14:32
성서일과
- 1독서 | 욥기 38:1 ~ 7 (34~41) 혹은 이사야 53:4~12
- 응송 | 시편 104:1~9, 25, 35c 혹은 시편 91:9~16
- 2독서 | 히브리서 5:1~10
- 3독서 | 마가복음 10;35~4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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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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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설 때에는…
1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여름의 열정이 빨리 식어지고 이 맘때는 누구나 시인이 되는 법입니다. 커피 한잔, 낙엽 밟는 소리에도 마음은 몽글몽글해지고, 이별이 서러운 유행가 가사를 듣다 ‘내 이야기’다 싶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내 이야기’로 경험하는 ‘공감’의 정서때문입니다. 따지고보면 공감이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내 경험을 터삼은 해석이니, 나와 아주 관계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너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다 보면 미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눈물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이들의 슬픈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지고가는 지친 어깨도 눈에 들어옵니다. 억울한 마음을 풀어내려 애써 독한 술을 들이키는 이들의 아픈 마음이 와닿을 때도 있습니다. 시작은 상대를 공감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매일 똑같은 아침, 피곤한 일터, 무표정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언제고 버리지 못해 제 손에 들려있던 것들 때문에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마주하는 일출의 모습이 수십억 짜리 보석보다 찬란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늘 시력이 어둠에 삼켜지기 직전일 뿐입니다. 손에 쥐었던 것이 빠져나가고 낯 익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낯설은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그 안에 담겨있던 가치를 알아채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됩니다. 이미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2
오늘 성서일과 연중독서들을 연결해 주고 있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던 욥이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를바가 없는데, 홀로 깨어진 삶과 직면하고 있는 그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의지적으로 힘을 다해 하나님을 붙들고 있던 그의 믿음이 언제라도 무너지고 말 듯 위태롭게 보이던 순간,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삶에 찾아든 고난의 원인을 날카롭게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 31:35
그의 고발과 비난에 답변해주시려는 듯 마침내 하나님의 변론이 이어집니다. 욥의 기소에 쩔쩔매는 피고석이 아니라, 흡사 피고를 매섭게 몰아세우는 검사석에 서 계신 것처럼 욥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십니다. 그러나 물음 하나 하나가 아득하기만 하니, 욥은 아무것도 답으로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에 있었느냐?’ 로 시작된 하나님의 심문은 무려 3장에 걸쳐 계속됩니다. 스스로를 변론하시거나, 고난의 이유라도 설명해주셔야 욥의 억울함이 좀 풀릴텐데 전혀 뚱딴지같은 말씀들일 뿐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 42:3
그렇지만 정작 억울해야할 욥의 얼굴에는 미소가 머물기 시작합니다. 비록 단 한 마디도 답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물어오시는 질문은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듣고 볼 수 없던 눈과 귀가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졌다는 말입니다. 질문을 바르게 알아듣게 되었으니, 그는 이제 그 만큼 바른 답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3
욥을 향해 수 없이 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는 누구일까?’라는 생각에 닿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부드럽고 따듯한 위로가 찾아옵니다. 늘 자식을 향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관심이 많으니 질문도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느냐?’, ‘친구들과 별일은 없었는지’, ‘공부는 재미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던 어머니의 물음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다시 보니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꼭 그렇게 들립니다. 마치 ‘나를 왜 이렇게?’라고 따져묻는 치기 어린 사춘기의 반항에, 늘 ‘너 그거 알고 있니?’ 친절한 물음으로 자신의 답을 대신해주셨던 어머니처럼.
정작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가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비로서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며 하나님 부재의 처지에 절규하던 욥의 형편과 상황은 전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42장 마지막 대목에 욥의 형편이 회복되었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대면하고 난 순간부터 이미 한치 앞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에 갇혀있던 그의 마음안에 새로운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봅니다. 만일 욥에게 찾아왔던 시련의 시간이 없었다면, 과연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파지(把持)할 수 있었을까?
4
이제 하나님을 향해 귀와 마음이 열려진 욥과는 전혀 다른 형편의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던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곧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때를 위해 수제자 그룹이었던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치고 예수님께서 일구어내실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간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말이 좋아서 그렇지 부당한 청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41절 그런 모습을 지켜보게 된 다른 제자들이 분개했을 법 합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속내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은, 실은 자신들도 그리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10:38
자신이 바라보고 계신 것과는 달리, 여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런 속도 모른 채 그들의 답변은 ‘할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차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주님이 받으셔야하는 잔과 세례인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서 잔을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거나 수치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고, 고난의 세례라는 것은 ‘세례’ 자체가 ‘죽음’을 뜻하니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은 고사하고, 질문의 의도 조차 제대로 알아 듣지있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 옆에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요한과 야고보, 그들이 아닌 이름 없는 강도들이었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이지만,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매서운 꾸중을 듣기는 했지만 욥이 하나님을 뵈옵고 회개했던 것처럼, 마침내는 이들도 목숨을 바치는 주님의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할 것, 먼저 경험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향해 듣는 귀,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겁니다. 욥의 말처럼 귀로 듣던 것을 눈으로 보듯 열려지는 ‘에바다’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경험은 아무때나, 또 제 맘대로 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암울한 현실속에 찾아오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물음앞에서 열림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를 빛으로 이끌고 나왔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근원적인 질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다며 부질없이 지나쳐왔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비틀거리는 세상속에서 삶을 흔들림없이 온전하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본질과 근원에 기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투박하고 녹이 슬어있어도 폭풍속에서 배를 지켜주는 것은 물속에 가라앉은 닻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근원을 향하는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또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또다시 지나치고 맙니다. 주님으로부터 듣지 못하고, 주님의 손을 보지 못합니다. 일상이 과잉에 내몰린 탓입니다.
6
과연 언제 이런 과잉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에 이어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될까요?
우리가 과잉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고난과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 성도인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야만 합니다. 응송인 시편의 기자는 욥을 몰아세웠던 하나님의 질문들을 고스란히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이유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음을 드높이며 함께 주님을 찬양하자고 우리를 북돋웁니다. 땅의 기초를 놓고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던 모습입니다.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지만 세상은 온통 혼돈과 어둠으로 짙게 덮여있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천지가 개벽하며 하나님의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어둠은 모두 깨어지고, 모든 선한 창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혼돈이야 말로 창조의 무대였던 셈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부활의 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 어둠, 혼돈, 고난이 삶을 찾아올 때에도, 생명을 잉태시키는 하나님의 소망을 보게 된 사람들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신앙’이란 고난이 찾아왔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른지를 찾아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내는 ‘힘’입니다.
말 못할 고난을 통과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고난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만큼 해왔으니 내게는 고난이 지나쳐가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성경이 경계하고 있는 ‘자기의’입니다. ‘자기업적’이나, ‘자기의’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불현듯 닥쳐오는 고난을 막아낼 수 없듯, 이런 것들은 고난속에서 우리를 구원해낼 수도 없습니다. ‘내가 왜?’라는 물음은 고난 자체에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자기연민의 유혹을 거부하고, 지금이야 말로 주님의 제자로 세우고, 하나님 백성으로 재창조해내시기 위해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었음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없는 삶에서 ‘고난’은 삶을 파괴하는 폭력이고 저주일 뿐이지만, 주님안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문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고난의 자리에서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써 기도하실 때,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브리서5:7~8)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감싸고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아멘.'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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