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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1/21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 왕국절 )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1. 17. 15:12

    성서일과 본문

    • 1독서 | 사무엘하 23:1~7 혹은 다니엘 7:9~10, 13~14
    •   응송 | 시편 132:1~12, (13~18), 혹은 93편
    • 2독서 | 요한계시록 1:4b~8
    • 3독서 | 요한복음 18:33~37

     

    설교음원

    http://naver.me/5B64LbP2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s_eOWcDbRb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90 

     

    네가,이냐?

     

    1

    모 당의 대선 후보가 손바닥에 한자로 왕자를 쓰고 다녔다는 이유로 곤혼을 치른 일이 있었습니다. 지지자가 그려준 것이라 해명을 하긴 했지만,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마치 ‘왕’이 되는 것처럼 여긴다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합니다.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은,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왕’은 주인보다 높은 개념입니다. 주인은 자기에게 속한 이들에게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왕앞에서는 모두가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비단 ‘왕’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정치인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닌, 우리들 모두 안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답답해 하고, ‘내 맘대로’되면 만족해 하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 관계, 삶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의 뜻대로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게 작동할 때 흔들리지 않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삶을 송두리째 맡길 만큼 ‘내 뜻’이나 ‘내 맘’이라는 것이 건강하지도 신뢰할 만하지도 못하다는 겁니다. 

    악한 주인을 만나거나, 그릇된 가치관을 가진 이를 지도자로 뽑으면 고통은 고스란히 함께 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하듯, 왜곡되고 깨어진 내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될 때, 삶은 허무하고, 절망스럽고, 불안정하고, 인생이 무질서하게 됩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왕으로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온 땅의 왕으로 세우셨음을 기념하는 ‘왕되신 그리스도주일’ 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를 왕으로 섬길 것인지, 아닌지의 두가지 선택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선택은 없으며, 누구도 이 선택 앞에서 에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왕과 주인으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제 부터 나는 어떤 상황이나, 사건, 세상 모두와 나 자신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 삼아서 살아갈 것이라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만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생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채우고, 이끌고, 책임지고, 주인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왜곡되고, 병들고, 깨어지고, 삐뚫어진 자기 자신 뿐입니다. 이런 삶에는 늘 불평과 원망과 절망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제 맘대로, 제 뜻대로 살아온 결과이니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임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또 이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한가지 질문을 통해 지금 내가 누구를 주인 삼으며 살고 있는지 진단해 봅시다. 이 순간,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고, 또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게 정의하고 판단하고 평가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 기준이 지금 여러분안에서 주인 노릇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2

    지난 주에 이어 1독서 본문으로 다니엘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6 ~5세기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 포로민이지만, 다니엘이 살던 상황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동일시하던 성서기자들에 의해 주전 2세기 경에 이르러 다니엘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읽을 때, 주목해야할 것은 다니엘이 어떻게 치열하고 잔혹한 시대를 살아갔는가? 또 무엇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내게 하는 것이야 말로 능력이고, 살아내는 것만이 신앙입니다. 다니엘은 당시 세상의 통치자인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던 중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묵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불의와 폭력과 불법을 일삼는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실리가 없다라는 겁니다. 그가 받은 묵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끝내 바벨론의 문화와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바벨론이 지배하는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결코 힘들지 않다거나 어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세상을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이래로 권력과 힘을 가지게 된 나라는 늘 그런식이었습니다. 침략하고 자신들의 소유를 넓히는 데만 혈안이 됩니다. 세상 만민에게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으스대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역사속에서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해도 결국은 패망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암울한 현실의 절망이 깊어갈 수록,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새로운 세계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분명하게 주목할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 아첨하는 세상, 불의함이 의로움을 비웃고, 물질이 하나님이 되어 버린 세상을 하나님이 용납하실리 없으신 분이심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이미 묵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는 다니엘 같은 살아냄이 보이질 않습니다. 마치 이런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보고 모든 것이 틀렸다고 자포자기 하거나, 세상이 본래 이렇다 체념하며 그저 한 평생 성공하며 사는 길만 찾아다닙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3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곧 바벨론을 무너트리신 이후에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제 곧 가장 강력하다고 하는 네 번째 짐승의 권세를 계승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주권을 위탁받은 ‘사람 모습을 한 이’ 인자(人子)가 일어날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를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는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 기자는 ‘사람의 아들’을 다니엘이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 본문은 ‘요한복음’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 배정할 만한 본문이라고 읽기에는 여간 어색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나 ‘영광’, 다시 오실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닌, ‘수난의 이야기’라니요.

    과월절을 앞두고, 당시 예루살렘에는 삼십만은 족히 넘을 만큼의 인파들이 절기를 지키려 몰려들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예민해 질 수 밖에 없는 기간입니다. 자칫 반란이나 선동의 불씨라도 당겨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특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상황을 놓칠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반 로마 운동의 주동자로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총독이었던 빌라도로서는 간과하고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고, 마침내 주님이 빌라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권위를 입고 있는 빌라도의 거만한 자세와 죄인처럼 붙들려 서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이질감을 가져다 줍니다.

     

    빌라도의 심문과 주님의 답변이 몇차례 오고가게 되는데, 이 대목을 주의깊게 살펴보셔야 합니다. 얼핏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의미없이 주고 받는 말처럼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네 번의 물음뒤에, 주님의 네번의 답변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물음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입니다. ‘네가 이렇게 기소되었는데 사실이냐?’는 기소 사실에 대한 확인인 셈입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주님의 답변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문이 담겨있습니다. 

    빌라도의 두번째 물음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했느냐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저들이 너를 고발했느냐는 물음입니다. 기소한 죄명은 있는데 어떤 죄를 지었는지가 적혀있지 않았던 탓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유대 기득권자들이 얼마나 조급하게 움직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튼 이제 주님 입장에서는 그 동안 하셨던 일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그 선한 삶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의 방향에서 어긋난 것처럼 쌩뚱맞은 답변이 이어집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시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여러분, 목사, 학생, 주부, 회사원 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맡은 역할, 혹은 직업을 통해서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할 수 있고, 그 안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우리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드시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4

    빌라도의 입장에서 세상은 오직 로마 뿐입니다. 로마의 발 아래 있던 세상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주님의 나라가 선포되었던 바로 그 순간, 로마의 운명도 결국 다니엘이 보았던 다른 제국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얼마나 길고 짧으냐만 있을 뿐,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무너질 나라들일 뿐입니다.

    이에 비해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누구나 보거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황제라고 하여도, 세상없는 권위자라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주님의 나라는 더 없이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버려진 이들, 심지어 죄인들도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주인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허락된 이들에게는 ‘은혜’일 수 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세계안에 들어와 누구의 통치를 받으며 살 것인지, 누구를 왕으로 섬기며 살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외 없이 이 강요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는 순간, 우리는 마음의 권좌, 인생의 왕위에서 물러나야만 합니다.

     

    이제부터 빌라도의 물음은 심문이 아니라, 궁금증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어떤 왕이냐?’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폭로된 하나님의 나라가 대체 어떤 곳이냐는 물음, 하나님께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향한 물음입니다. 주님을 향해 던지는 진지한 물음은 늘 진리를 향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5

    나라가 다르다는 주님의 말씀은 통치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주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세상의 왕이나 권력은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본래 권력의 속성이란 늘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전 삶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왕이 희생하는 나라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수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주시는 나라, 결국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에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난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길일 수 밖에 없는 걸까요? 

     

    요한사도는 교회들에 써보낸 계시록에서 예수님이야 말로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우리의 왕이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계시록 1:5b). 죄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서글프고, 화가나고, 서러운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던 물음들,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속절없이 삶을 깨트리고 파괴시키고, 하나님께서 ‘살라’고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세입니다. 이 힘앞에서 우리는 너무 무력합니다. 

    죄는 에덴에서 인류를 실족시키고, 광야에서 예수를 넘어트리려고 했던 마귀의 속삭임처럼, 우리 삶에 너무나 깊숙하고 또 대단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찾아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눈을 가리우는 것들, 저것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탐스러움, 남부러울 것 없고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정점에 서서 ‘왕’이 되라는 달콤한 유혹들, 누구나 그리 살고있고, 또 살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합리화의 이름을 가진 것들입니다. 

    누가 뭐래도 오늘 이 시대에 그런 마성의 정점에 있는 것은 ‘돈’입니다. 돈의 지배력에 떨어지고 나면, 마치 제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타락하거나, 반대로 우리 속에 갇혀 버린 짐승처럼 비굴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유와 기쁨 보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좌절만 삶을 채우게 되니, 결핍과 갈망과, 탐욕이 빚어낸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돈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돈이 가르쳐주는 방식대로 작동하고 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삶의 의미와 꿈과 소망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양심도 팔고, 인생의 꿈 조차 돈을 벌기 위한 ‘직업’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닿는 꿈을 꾸어야 할 젊은 세대도 소비와 향락이라는 돈의 가치에 잠식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성도들도 돈이 없으면 복이 없고, 하나님의 일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또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돈이야 말로 황제나 신처럼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치명적일 만큼 매력적인 유혹으로 우리를 붙들고, 결국은 악마적인 힘으로 삶을 파괴해 버립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모두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은 기쁨도 영원한 기쁨이며, 승리도 영원한 승리이며, 생명도 영원한 생명 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영원히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꿈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이 주신 본래적 생명을 온전히 누리고, 보시기에 좋았던 존재로 살 뿐 아니라, 깨어진 세상과 땅을 복되게 만들어가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을 지나지 않고는 회복을 경험할 수 없고, 죽음을 지나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는 법입니다. 회피가 아닌 상처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나음을 얻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어둠이 가져다 주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뛰어넘게 됩니다. 제 자신의 걸음으로 지나가지 않은 것은 결국은 다시금 앞을 가로막게 되고, 또 다시 그 앞에 넘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삶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 절망과 슬픔, 서러움과 고통은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왕 노릇하려는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그래서 늘 죽음을 무기삼아 우리를 지배하려는 죄를 무너트리고, 그 힘인 죽음을 깨트리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땅의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세를 홀로 독차지 하실 수 있으심에도, 우리와 함께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어주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생명의 길을 걸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시는 죽음이 공포와 두려움이 되지 않도록 죽음의 권위를 파괴하고 박탈하시기 위한 길이야 말로, 왕 되시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남긴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 요한복음 18:37b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빌라도 처럼 왕 앞에서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로 서야만 합니다. 주님이 왕이시라는 백마디의 빈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삼키기 어렵고, 힘겨워도 목숨을 걸고 그 말씀을 새기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울림이 있는 큰 외침이 되는 법입니다.

    그 동안 주님이 왕이시라는 우리의 외침은, 왕이니까 왕처럼 책임져달라는 요구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말씀들어야하고, 당신을 따르라 하시는 분앞에 엎드려야만 합니다. '네가 왕이냐?' 물음은 우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향해 물으시는 물음일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탐욕과 아집, 상처와 아픔마져도 제 자신의 소유물처럼 꼭 움켜쥔 채, 주인행세하려는 우리에게서, 이제는 인생 전체의 권리를 건내 받기 위함입니다. 빼앗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온전하고 풍성한 하늘의 생명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당신의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을 믿으십시오. 믿었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삼으며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왕이신 당신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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