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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2/05 주현후 다섯 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 31. 11:16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이사야 58:1-9a(9b-12)

      응송 | 시편 112:1-9(10)

    2독서 | 고린도전서 2:1-12(13-16)

    3독서 | 마태복음 5:13-20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 01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시겠지만 도무지 신앙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회의가 들만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삶과 불일치 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몇 주전에 인터넷 기사를 읽다가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천안시에 1조800억 가량을 투자해 한국기독교기념관이라는 것을 짓겠다고 하는 기사였습니다. 막대한 공사비는 둘째치고 눈살을 찌푸리고 뜨악하게 되었던 이유는, 그곳에 137m짜리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수상을 세우겠다는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착공신고 자체가 다 취소되었음에도, 주최측은 지난 연말 여당의 당권주자까지 모시고 착공기념예배라는 것을 드렸다고 합니다. 명백한 사기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이나 선교 운운하는 이런식의 선동에 휩쓸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계 최고’라는 탐욕이 ‘신앙’의 언어로 둔갑된 모습, 한국 교회의 민낯이며 우리 신앙이 현주소입니다.

     

    # 02

    일전에 모든 인간 활동은 삶을 ‘구원’해 내기 위한 종교성을 가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와 행복으로 구원해 내기 위한 것입니다. ‘행복’에 닿으려는 그런 열심은 늘상 다른 누군가보다 더 나은 업적과 조건을 충족해야한다는 불안함과 부담 때문에 늘 강요와 경쟁으로 치닿기 마련입니다. 그럴 수록 삶은 무겁고, 불안하고, 허무해질 뿐입니다. 이런 방식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과 항거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위대한 선언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수고와 억압, 숙명의 부담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다거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억압으로부터의 벗어나는 자유의 경험인 셈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빼앗긴채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그런 식의 ‘구원’을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고, ‘예수’를 통해 얻게 되는 ‘자유’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계 2:6, 15절에 나오는 ‘니골라당’ 처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자유’를 마치 무책임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가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가는 티켓을 구입하는 것처럼 이미 예수를 믿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착각하고,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려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난합니다. ‘구원’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5:20b

     

    # 03

    주님의 말씀에 할 수만 있으면 신실하게 응답하려는 분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정의를 이루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앞장서는 분들도 있고, 주일 성수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 누가 더 십일조를 많이 드리는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봉사를 하는지 율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경쟁하듯 노력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수준은 세상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모범적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안팎으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이 만큼의 업적을 쌓고, 이 정도는 해내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겠다는 ‘자기의’와 ’율법주의’, 경쟁으로 치닿는 세상의 방식에 빠진 탓입니다.

    주님은 이런식으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율법적으로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린 아무리 애를 써도 목숨을 건 그들의 열심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들보다 더 율법적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사는 모범을 보이시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서 곳곳에는 안식일 규정이나 율법을 거스르시는 그분의 모습이 더 자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율법을 깨트리고 어기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본질에 닿아 계셨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여전히 율법의 준수와 같은 형식에 빠져듭니다.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을 놓치고 얼마나 ‘율법’을 지켜낼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겁니다. ‘지켜낸다’고 하니까 대단한 신앙처럼 보여도, 실은 그 마음안에는 ‘이 만큼 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하는 불안과, ‘내가 이만큼이나 했다’는 ‘자기의’가 충만할 뿐입니다.

     

    # 04

    구약 본문인 이사야서는 특별히 ‘금식’과 관련해 유대민족의 기만적인 율법적 열심주의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경건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며, 형식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율법을 대표하는 경건행위 중에 하나로서, 말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 ‘곡기’를 끊는 겁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끼니를 거르는 수준이 아니라 가장 원천적인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살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성을 거스르고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내고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본질적인 것에 다가서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본질적인 그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입니다.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그 동안 시선을 빼앗고 삶을 소비하게 만들었던 ‘생명'아닌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많이 가지고 얻고 자기를 강화해서가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금식’을 통해 자꾸 덜어내고 버리는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데, 도리어 온통 바라는 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만 매달립니다. ‘금식’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설득하고 떼를 쓰는 기도 즈음으로 생각한 탓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어처구니 없이 자신을 강화하려고만 하니, ‘죽어야만 다시 사는’ 부활이 능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겁니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 이사야 58:3

     

    이사야의 눈에는 유다 백성들의 금식에는 온통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것에만 치우져 보였습니다. 겉으로만 그럴 듯해 보일 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향락’에만 쏠려 있습니다. ‘향락’이나 ‘쾌락’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경건생활, 율법을 이루려고 하는 열심안에도, 이런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신을 채우고, 하고 싶은 것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 뿐, 하나님을 아는 일, ‘생명'에는 무관심하고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 05

    어떻게 하면, 이런 가식에 떨어지지 않고, 본질적인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집중하며 살 수 있을까요? 2독서 서신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2:4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면, 쉽게 성공하고 부자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살이의 요령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면 어려운 일을 면케 되고,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은 성공한 목회를 ‘하나님의 지혜’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은 세상살이의 요령을 터득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은 처세술 같은 것이 아니라, 실재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경험은 오직 ‘성령’이 나타낸 증거, ‘성령'이 계시하신 것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2:4, 10)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도,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뭔가 신령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 처럼 말만 하면 ‘성령과 교감한다’거나 ‘응답을 받았다’면서 자신만 어떤 진리에 이른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이들을 보며 내심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처세술’ 정도로 떨어지고 만겁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힘과 명예로 누리고 있는 세상의 권세자들과 함께 없어질 모든 것들이 ‘세상의 지혜’ 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있을 지혜, ‘진리’가 ‘하나님의 지혜’인 겁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감추어져있지만,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우리의 구원,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폭로되고 계시되었습니다.

     

    # 06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도나 전도, 섬김이나 봉사, 업적이나 성과, 성공한 목회로는 알 수 없습니다. 천사처럼 거룩해보이고 삶이 형통해지는 것도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의’나 ‘자기 업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안에 그 답이 분명하게 들어 있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 마태복음 5:16 

     

    결국은 ‘착하게 살라’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신다면, 아직 ‘율법’이나 ‘복음’의 본질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에게는 ‘착한 행실’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기만에 그치고 정죄감에 떨어질 뿐입니다. 앞선 13절과 14절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 마태복음 5:13~14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소금’과 ‘빛’이라는 본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짠 맛’이 없다면 소금이 아니고, ‘빛’이 없다면 ‘어둠’일 뿐입니다. 뭔가를 해내야만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니고, ‘소금’이고 ‘빛'이니까 뭔가를 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금’이 소금으로 있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당연히 짠맛이 날 겁니다. ‘짠맛을 내야한다’는 결과가 아니라, ‘소금’이라는 존재가 본질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다시 읽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이나 ‘빛’이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금’이고, ‘빛’이냐는 겁니다.

     

    과연 내가 ‘소금’인지 ‘빛’인지 그것을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최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 뿐입니다. ‘살아내라’고 요구하는 바쁜 세상살이가 이런 집중을 방해하지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초기 교회 공동체가 살아갔고, 주님도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관통하셨습니다. 

     

    # 07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율법주의’적 열심이 아니라 ‘복음’, ‘믿음’, ‘은혜’를 누리라는 말씀을 불편해 합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살라는 것인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목사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 게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삶의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 마태복음 5:16

     

    이 말씀이 제가 전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착한 행실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착한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빌립보서 1:6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착한 행실을 전하는 ‘빛’과 ‘소금’으로 불러주셨으니, 결국 착한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실 겁니다. ‘행함’이나 ‘업적’, ‘자기의’가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길입니다. 단 한줌의 ‘빛’이라도 ‘빛’이고, ‘짠 맛’이 남아 있다면 정도와 관계 없이 여전히 ‘소금’인 겁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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