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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주현후 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2. 7. 16:39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신명기 30:15-20
응송 | 시편 119:1-8
2독서 | 고린도전서 3:1-9
3독서 | 마태복음 5:21-37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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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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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1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일에 사로잡힌 우리의 걸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특별히 달라 보이질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으로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곤하고, 버거운 일들이 계속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를 신뢰하고 믿지만, 지금 당장 ‘돈’이 통치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에서의 ‘오늘’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육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에서는 ‘세속의 원리’를 따라 살고 교회에서는 ‘신앙의 원리’를 따르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대부분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한 체 적당히 타협하거나, 믿음이 능력이 되지 않는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지만, 오늘도 우리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답을 찾아 말씀 앞에 섰습니다.
2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은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과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서 치열하게 씨름했던 결과였습니다. 교회안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세계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퀴리오스’ (주님)로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 고린도전서 3:1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도의 눈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육’에 속한 미숙한 ‘어린 아이들’같아 보였습니다. ‘어린 아이’같다는 것은 믿음의 방식이 아닌, 인간적 방식, 세속의 생활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빗댄 표현입니다. 마치 돈과 명예가 질서가 되는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겠다고 버둥거리는 우리들의 신앙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가 거친 세상에 내몰려 있는 그런 교우들의 형편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힘이 거칠고 매서울수록 더욱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이 꿈만 같은 초대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우리의 ‘선택’ 뿐입니다.
3
오늘 구약본문 신명기 30장도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둔 목전에서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던진 말씀입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는 ‘생명’이나 ‘복’을 얻을 수도, ‘죽음’이나 ‘저주’를 당하게 될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운명이 그들 앞에 놓여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가늠하게 될 기준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마치 ‘선택’을 권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말은 한명도 예외없이 하나님을 따르라는 강력한 명령인 셈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살고 죽는 문제’라고 힘을 주며 말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곧 출애굽 공동체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 ‘선택’을 강요받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서 살기 위해 결국 이스라엘은 풍요를 관장하는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선택할 것이 뻔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 신명기 30:19
그런데 재미난 것은, 정작 모세가 백성들에게 ‘생명’을 선택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자 합니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과 선택은 살아내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살고자 하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우상’을 선택한다고 해도 결국은 살고자 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살 길’을 택하라는 모세는 명령은 얼핏 부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사실 ‘살고자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이 자신을 살리는 선택인지, 무엇을 통해 살 수 있는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야 말로 문제인 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의 선택의 문제는 생명이신 하나님과는 관계 없이 그저 자신들이 보기에 ‘살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겁니다.
4
마치 ‘인생'이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선택’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오늘도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는 자리로 내몰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될른지 모르고, 결과를 감당할 능력도 없으니 누구라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우리 바램과 달리, 정작 중요한 ‘선택’은 언제나 스스로 결정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 할까요? 대체로 현대인들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이나 이득일 겁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스스로 더 절실하게 여기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될 뿐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선택했던 그것이 내가 절실하게 바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선택해 왔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의 기준은 참으로 귀한 ‘생명’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선택의 기준이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선택을 돌아보면 그 동안 얼마나 ‘생명’에 절실하지 않았는지, ‘생명’되시는 주님께 간절하지 않았는지가 드러날 뿐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의 선택은 늘 당장 눈앞에 있는 이득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생명’ 자체에 무관심하다 보니, 당장 오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만 마음을 빼앗긴 채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겁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막연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동안 ‘생명’을 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마땅하고 당연스럽게 여겨온 탓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생명’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너무 당연하니 ‘숨’쉬는 것, ‘먹는 것’, ‘하루를 살아가는 것’ 쯤은 심드렁하고 눈에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에 부수적인 것들을 ‘행복’이나 ‘잘사는 것’이라 믿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에 휘둘릴 뿐입니다.
5
복음서 말씀에는 이처럼 어그러져있는 우리의 생각과 선택을 전복시키는 주님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며 소위 ‘반명제’라고 불리우는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모두 ‘살인’, ‘간음’, ‘이혼증서’, ‘맹세’, ‘앙갚음’, ‘이웃사랑’ 여섯개의 반명제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배정된 말씀에는 앞의 네가지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음안에 얼마나 율법적이지 않은 생각을 채우고 있는지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살인’이나 ‘간음’하는 마음을 가득 품고 있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더 거룩하고 선하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이나 ‘간음’같은 결과는 그저 기회를 틈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그가 품고 있는 ‘속 마음’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인데도, 눈에 보이질 않으니 사람들도 마음의 중심을 바라보려고 애쓰질 않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얼간이’나 ‘바보’라고 말하는 것도 ‘살인’에 해당하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율법은 이혼증서를 써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주님은 이혼증서를 써주면서까지 여인을 버리려고 했던 비정한 마음을 비난하십니다. ‘간음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상대를 버리는 것은 ‘죄’일 뿐입니다. 모두가 드러난 결과가 아닌 마음에 무엇을 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배정된 말씀의 다음 단락이기는 하지만 ‘이웃사랑’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웃사랑’이라고 하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선이나 선행을 떠올릴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런 현실감각을 훨씬 뛰어넘어 버립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주님이 정해주신 사랑해야 할 ‘이웃’에는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사람도 포함이 됩니다. 원수는 커녕 ‘이웃’을 사랑하는 것조차 미숙하고 각박해져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도무지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기준이라면 우리 중에 하나님께 용납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차라리 주님의 말씀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가벼워 보입니다. 우리는 어찌해야하는 걸까요?
6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해답과 결론은 마지막 절인 48절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 마태복음 5:48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레위기 11:45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명제’의 핵심은 결국 ‘완전’의 수준에 이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합니다. 말씀에 아무리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고, 스스로를 북돋우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는 없는 겁니다.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할 수 없는 명령을 붙들고 씨름을 하려고 하니 ‘영혼’이 지치고 탈진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이처럼 ‘율법’은 언제나 우리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무력하고 무의미한 존재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심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이 우리는 결코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심판’인 겁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늘 ‘자기의’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해 내려고 합니다. ‘율법’의 의로움을 이루려는 세상과 이방인들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완전해 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편한 말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히려 업적이나 명성을 더 얻으려하고 더 열심을 냅니다. 열광주의나 은사주의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무관심한 채 살아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인류 모두의 운명은 여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수준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낭패로 빠트리는 심술궃고 고약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완전해 지는 길이 있음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 길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길입니다.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의로움’을 추구하느냐?로 신앙과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겁니다.
7
완전에 닿을 수 없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구원받은 ‘신앙’의 삶입니다. 모세는 30: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 신명기 30:20a
하나님께 잇대어 생명을 구하는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켜내고 또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길 뿐입니다. ‘말씀’에 집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간절히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그분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을 따르며 사는 길과 믿음으로 사는 길의 갈림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 것인지, 설교의 첫머리에서 던졌던 물음에 답을 찾으셨는지요? 어떤 선택을, 얼마나 잘, 얼마나 더 해낼 수 있는지의 기만과 강요와 부담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는 율법의 완성을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와 생명의 길 되어주시는 주님만을 믿으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염려할 필요도, 어떤 선택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부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 안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에 함께하는 벗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착한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그 날까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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