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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2/19 주현후 마지막주 (주의 변모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2. 15. 10:1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24:12-18

      응송 | 시편 99

    2독서 | 베드로후서 1:16-21

    3독서 | 마태복음 17:1-9

     

    # 설교음원

    http://naver.me/GguAES0U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B6V-EhAkZ-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Luca Giordano, 「Transfiguration of Christ」 (1685) ⓒGetty Image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 마라'

    1.

    오늘은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변화주일’ 또는 '주의 변모주일'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이 지나면 교회력의 시간은 돌아오는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주현’을 기념하는 절기를 마치고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길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십자가’를 향해 곤두박질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비록 짙은 죽음의 그림자에 삼키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길을 잃은 우리에게 충분한 길잡이가 될 만큼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서의 ‘빛’은 밝고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일과 본문은 바로 그 ‘빛’에 관한 말씀입니다. 1독서인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는 산위에 올라갔다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마주했었는데, 복음서 말씀은 산위에 오르셨던 예수님이  그 ‘빛’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다 ‘산’위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런 사건은 산 아래서는 경험할 수 없고, 오직 산 위에서만 잠깐 엿볼 수 있음을 뜻합니다. 대체 복음서 말씀은 이 사건을 통해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여야 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2.

    사람들은 보통 이 본문을 접할 때, 산 위에서 일어났던 신비로운 현상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이런 사건은 산 위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여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삶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황홀경이나 은사 체험들은 제아무리 불같이 뜨거운 경험이라도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허무해질 뿐입니다. 이걸 놓치고 현상만 쫓다 보면 영혼 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피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산 위에서가 아니라, 산 아래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표징일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사건의 핵심은 그 중심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대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인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지만 이들은 산 아래에서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과 ‘음성’은 오직 주님을 향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사건은 전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의 목격을 바탕으로 쓰였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무언가 놀라운 일이 예수님께 일어났음을 목격하고 경험했는데, 그것이 ‘빛’이고 ‘음성’입니다. 이것들은 오직 제자들의 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이 무엇이고 그 음성이 어떤 식으로 울리고 제자들이 듣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이 바로 교회를 지탱해온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분이 그리스도시라고 믿을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예수님안에서 발견과 경험했다고 하는 제자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의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마태복음 17:4

     

    산 위에 내려앉은 ‘빛’ 가운데서 보게 된 예수님은 그동안 따르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보입니다. 충만하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곁에 서기조차 두렵고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버겁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으니 지금 이곳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황홀경 같은 ‘빛’에 사로잡힌 후, 곧장 두 번째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소리’입니다. 5절 후반절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마태복음 17:5b

     

    아마도 말씀을 듣는 순간 곧장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던 장면을 기억해내셨을 겁니다. 그 만큼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동일한 말씀이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던 그때에도, 하늘로부터 울려 퍼졌습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곧장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상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지금 예수님 안에 동일한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나 능력이 임하였다는 겁니다. 그 권위와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설교를 통해 말씀 드려왔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구원’의 능력이 충만합니다. 문제는 ‘구원하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구원’이란 기껏해야 병이 낫거나,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아니면 신앙적으로 믿음이 든든해지고, 구원의 확신이 생겼다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원은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고, 또한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또다시 삶의 문제에 무너지는 우리를 건져내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 궁극적인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된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그 말씀안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심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죄인이나 노예로 죽음에 짓눌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예수를 통해 이 사실을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에 삶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말씀에 큰 감흥이 없습니다. 감흥없이 심드렁하게 ‘아멘’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속 안에서 살아가는 일에만 관심이 가득할 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의 실재적 능력에 무지한 탓입니다. 교인 수가 줄어들고 교세가 약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길인지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위기인 겁니다.

     

    4.

    산 위에서 제자들이 경험은 ‘빛’과 ‘음성’이 전부입니다. 그동안 산 아래에서는 보지 못했는데, 그덕에 오늘은 주님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충만하게 담겨 있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빛’이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비추어주었고, 하늘에서 외쳐진 그 말씀이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무딘 영혼을 깨우쳐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빛도 사라지고 음성도 그쳤습니다. 주님의 모습은 이전에 산 아래에서 뵈었던 그 모습일 뿐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제자들의 눈은 이제 다시 주님 안에 있는 능력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빛’이 비추고 눈이 열리지 않는 한 아무리 기를 써보아도 주님의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이란 이런 겁니다.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빛’,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만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숱하게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제자들이지만, ‘그리스도’를 보게 된 오늘의 이 경험이 결국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질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변화산 사건’은 ‘부활’과 더불어 산 아래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종말론적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빛’이 있다면, 언제라도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마태복음 17:9

     

    그래서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제자들에게 침묵 명령을 내리셨던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녀봐야 ‘빛’이 임하지 않는 한, 결코 종말에만 드러날 일을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 번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라거나, 메시아라는 사건은 이처럼 ‘빛’을 통해만 볼 수 있는, 감추어지고, 비밀스러운 사건입니다. 

    비밀은 감추어진 이들에게는 없는 것이지만, 폭로된 이들에게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비밀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공식화하거나 수단화할 수 없습니다. ‘비밀’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계시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 여기에서 일하고 계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추어져있고, 놀라운 겁니다.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릴 것이 아니라, 계시의 빛으로 드러내어 주실 때까지 부재하신 것처럼 감추어 계신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신자를 늘리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식으로 여기에 계시다거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떠벌리면 곤란합니다.

     

    5.

    주님의 ‘재림’에 관한 이어지는 3독서 베드로의 서신서는 얼핏 변화산 사건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재림’은, ‘변화산’사건이나 ‘부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2세기 초까지도 약속된 재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계속된 재림의 지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지켜내려는 성도들과 교회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산 위에서 있던 그 사건이 언제쯤 일어날 것인지 묻는 상황과 동일합니다. 지금도 교회 밖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또 스스로는 어떻게 답하고 계십니까? 하루라도 빨리 재림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 답답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 베드로후서 1:18

     

    재림에 대한 사도의 확신은 산 위에서 경험했던 그날의 기억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날도 놀라운 경험을 뒤로 한 채 주님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산 아래의 상황도 여전했고, 주님의 모습도 이전과 똑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후부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빛으로 둘러싸였던 주님의 광채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은 더욱 생생해졌습니다. 그 기억이 오늘도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그 날이 몇 날 몇 시일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영혼을 일깨우는 ‘소리’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주의 대변혁인 세상의 끝날이 아니라 이 믿음 안에서 현재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금, 여기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이야말로 ‘재림’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산위의 경험’이나 ‘재림’은 동일한 사건입니다. 전자는 지나간 제자들의 경험이라면, 후자는 종말에 우리 모두가 맞이할 경험입니다. 그래서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의 신앙은 ‘산위의 경험’의 토대 위에 살아갔던 사도들의 삶과 고백을 따를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서 믿음으로 살아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장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계신 것처럼 살아내야만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제자들처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목격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음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말씀은 허탄한 신화도 아니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처세술이나 교양도 아닙니다. 삶을 조금씩 교정해나가거나 그래서 거룩한 성도가 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집중하는 게 핵심입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이 주어지듯, 진리와 생명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폭로하시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에게서 시작했다는 사실에 삶을 일치시켜가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6.

    십자가를 앞둔 암담하고 두려운 현실에 주님을 덮었던 ‘빛’과 ‘음성’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였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엿본 후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의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 마태복음 17:7

     

    주님이 먼저 따듯한 ‘빛’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제자들 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먼발치에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두려움에 내몰린 모든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떨고 있는 몸을 따듯한 손으로 감싸주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의 순서를 주목해 보십시오.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고 채근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좀 믿어봐라’ 타박하는 우리와 달리 주님은 먼저 자신을 양식으로 먹이셨고, ‘좀 사랑해라’가 아니라 먼저 ‘사랑’해 주셨으며, ‘좀 말씀대로 살라’하시기 전에 ‘말씀’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 음성을 듣고 아무리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손을 내미시고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결단해도 결국은 두려움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그분의 명령에 응답하고 내미신 손을 붙잡고 일어서면,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분은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참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산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빛이 재림의 그날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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