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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주현후 마지막 ( 변모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2. 6. 17:3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열왕기하 2:1~ 12
응송 | 시편 50:1 - 6
2독서 | 고린도후서 4:3 ~ 6
3독서 | 마가복음 9:2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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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1
새로운 한해가 되면 교회마다 신앙 목표나 표어를 내겁니다. 대부분 변화된 삶, 성도 다운 삶을 살자는 권면안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 베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 간절함은 성도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튼 변화를 꿈꾸고 재촉하는 간절함이 늘상 똑같다는 것을 보면, 오히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대로 살고, 구원받은 자 답게 신앙생활하며 사는 것이 마땅할 텐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오늘은 이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교회력상으로 오늘은 주현후 마지막 주일이며 주님의 변모주일이기도 합니다. ‘주현’의 기간은 오늘을 기점으로 모두 끝이 나고, 돌아오는 14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런 교회력의 변화가 담고 있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그날 주님을 따라 산에 올랐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명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빛’처럼 광채에 둘러쌓이는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동안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놀라운 일들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을 목격한 이제서야 비로서 제자들은 주님이 도저히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산' 위에 오르셨다가 변모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두가지 생각을 품게 됩니다. 첫번째 나도 제자들처럼 주님의 변모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놀라운 증거나 표징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 자신이 예수님처럼 존재가 변화되거나, 그럴만큼 변화된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일 겁니다. 이런 우리의 간절한 마음은 1독서 구약본문을 읽을 때에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만큼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를 통해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겁니다. 하지만 이번의 부르심은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이 아니라, 사명을 모두 마친 그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아쉽다고, 더 할일이 남았다고, 나 아니면 않된다고 버티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습니다. 평생토록 주님께 순종했던 것처럼, 최후의 부르심 앞에서도 그는 오늘도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곁에 함께 하는 이가 있습니다. 제자 ‘엘리사’입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납니다. ‘요단강' 앞에서 그 둘은 갈라져야만 합니다. 아무리 원해도 ‘엘리사’의 동행은 그곳까지 입니다. 우리 말에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음의 여정을 따라 갈 수 없고, 대신해 줄 수도 없습니다. 이제부터의 길은 ‘엘리야’ 홀로 가야하고, ‘엘리사’는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는 갑자기 나타난 불병거와 불말이 그 둘 사이를 갈라놓았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의해 하늘로 올려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극적인 장면은 사람이 불병거와 불말을 탈 수 없는 것처럼 ‘엘리야'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마치 산위에서 광채에 휩쌓였던 복음서의 주님처럼 ‘엘리야’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에서 성서기자가 이야기 하려는 핵심 인물이 ‘엘리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제 아무리 대단한 선지자라고 해도 이제 그의 역할은 끝이 났고, 그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에는 ‘엘리야’가 아니라, 그 만큼의 사명과 능력을 가진 새로운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3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열왕기하 2:9
이렇게 간구한 ‘엘리사’가 능력의 종이 되었다는 점 때문인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믿음, 그런 간절한 신앙인이 되자는 식으로 본문을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명을 마치고 떠나는 스승 ‘엘리야’에게 ‘당신보다 더 큰 능력을 얻고 싶다’던 ‘엘리사’의 바램은, 사실은 민족의 지도자를 잃은 채 열강의 위협을 헤쳐나가야만 했던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스승보다 갑절의 능력을 받고 싶다던 그의 바램은 이루어졌습니다. 능력없던 그가 이제는 민족의 내일을 밝힐 선지자로 변화된 겁니다. 하지만, 이건 ‘엘리사’의 바램이나, 간절함, 믿음이나, 자질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구했을 뿐이고, 그를 변화로 이끈 것은 ‘영감’, 즉 ‘성령의 충만’덕분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는 배타적인 은총 사건이라고 합니다. ‘엘리사’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빛으로 변화되셨으며, 사도 바울도, 제자들이나 교회도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로 운명이 뒤 바뀌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서일과 본문에 등장하는 ‘변화’된 이들 모두 사람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무엇이 변화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바라고 소망하는 ‘변화’는 어떤 것들입니까? 한국교회 만큼 이런 ‘변화’를 갈망하는 교회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말과 행실, 인격과 품성, 신앙생활의 변화를 요구하고, 성도들 역시 예수 믿는 사람답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엘리사’처럼 갑절의 능력을 얻거나, 산위에 올랐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일어났던 그런 경험에 목말라하기도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잘 믿을 수 있고, 변화될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건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산’위의 사건이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이후의 교회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무지함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놀라운 사건을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실감한 이들에게만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 예수님의 변모, 그리스도로서 그분의 실체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비록 비틀거리는 수준이긴 했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의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서툴고 비겁한 제자들이 ‘사도’로써의 늠름한 모습으로 송두리째 뒤 바뀐 것은, ‘변화산’위의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4
여러분은 스스로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현재 우리 자신의 신앙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타성에 떨어져있는 모습이 실망스러운 탓일 겁니다. 왜, 이렇게 ‘변화’는 더디고 어려운 걸까요?
이건, 우리가 여전히 ‘변화’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탓이 분명합니다. 늘상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도덕이나 윤리, 심리학이나 교훈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죄로 인해 죽은 우리, 하나님 없이 죽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나는 살았다’는 ‘복음’, 우리 구원을 위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셨다는 기쁨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우리는 지금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생명의 실체를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의 그 날에 확인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내 사건으로, 내 구원으로 경험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며, 이 믿음이 있기 전과 믿음 이후의 우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겁니다.
변화가 없다는 말은 죽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 보이고, 아무리 더뎌보여도 날마다 그리고 언제나 변화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명이 있으므로 오늘도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이 분명한 겁니다.
물론 여전히 ‘변화산’에 오르자거나, ‘변화산’의 이름을 따른 기도회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곳에 오르고, 그런 사건이나 표징을 목격하고 싶다는 불안과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생명이 우리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한번 복음서 말씀을 찬찬히 묵상해 보십시오. ‘산’위에서 일어났던 그날의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산위에서 변모하시는 주님과, 그분 곁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를 목격했던 ‘제자’들의 반응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9:6
단 한번도 듣거나 보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 앞에 서게 되면, 누구나 ‘기쁨’, ‘환희’, ‘놀라움’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도 이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직면하는 순간이면, 오히려 바램이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하늘을 헤아리는 것도 아득한 우리가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창조주를 경험하게 된다면, 말문이 막힐 만큼 아찔해지고 말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날 ‘산’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인간이 조작하거나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경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직면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무력함이 드러나고, 그것을 직면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여튼 산위에서 일어난 이야기의 핵심은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5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마가복음 9:7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런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곧 주님은 ‘죽음’이 입을 벌리고 삼키려고 하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그런 위태로운 순간에도 주님께서 ‘빛’으로 빛날 수 있던 것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고 계셨고, 하나님도 주님과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사’가 능력을 힘입게 된 것도 제 힘으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승 ’엘리야’의 곁에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영감’을 입을 수 있었고, 어둠 가운데 사로잡혀있던 사도 ‘바울’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빛이 있으라’는 그 한 말씀,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안에서만 가능했던 일입니다.(고린도후서 4:7)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복음의 정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런 삶을 살라’고 선동하는 세상을 밀어내고, 진정한 변화, 생명을 얻는 참된 변화란 ‘어떻게’가 아닌 ‘누구와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증언하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이방인들처럼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전전긍긍하며 방황하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분께로 돌이키십시오. 어둠을 밝히려 애쓰지 마시고 ‘빛’을 향하시면 됩니다.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주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외치게 될 겁니다. ‘나는 살았다’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 마가복음 9:8
눈 앞에 펼쳐졌던 놀라운 사건으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횡설 수설할 만큼 두려움에 떨어졌던 제자들입니다. 하지만, 문득 정신이 들고보니, 모세와 엘리야와 그들을 덮고 있던 구름도 보이지 않고 어느새 예수님과 자신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산 위의 사건이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절대적인 사건이나 경험라는 것이 언제나 한 순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히려 현실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분주하고 막막할 겁니다. 현실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은 겁니다.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해도 일상의 모든 순간 은혜를 실감하고 사로잡힌 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이상 나도 언제쯤 제자들 처럼 ‘산’위에서의 경험을 하게 될까, 어떻게 해야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은 한순간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은 산위가 아닌, 산 아래 제자들의 삶으로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하는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 산 아래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 날의 사건을 기억하고,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일을 나의 이야기로 공유하며, 산 아래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거칠고 투박하고 삶을 생생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초월적인 산 위의 일들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일상과 현실에서 받아들이고 믿으며 살아가는 일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과, 교회,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의 증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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