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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2/04 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2. 1. 12:5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0:21 ~ 31

      응송 | 시편 147:1~11, 20c

    2독서 | 고린도전서 9:16~23

    3독서 | 마가복음 1:29~39

     

    #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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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램브란트'와 '제임스팃소'의 성화 두점을 올립니다. 예수님과 맞잡은 두 손에 주목하며 보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1650

     

    귀신을 내쫓는 일과, 고침

     

    # 01

    종전을 향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벌써 4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상대를 끝장내겠다며 하마스의 땅굴에 바닷물을 들이붓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살육에 눈먼 보복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느새 발발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여전합니다. 참혹하고 끔찍한 인간 악의 끝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이렇게 아득하기만 한데, 정작 가족을 잃고, 삶의 터를 잃어버린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과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란 존재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독서 이사야 40장 본문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현실이 꼭 이런 형편이었습니다. 거대 제국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수 밖에 없던 처참함, 그리고 그 이후의 형편을 담고 있는 것이 제 2 이사야로 불리우는 40장부터 55장까지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망하고 깨어져버린 역사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꿈꾸는 것조차 사치로 보였을 겁니다. 모두가 ‘그러려니’, ‘이제는 틀렸다’는 포기와 절망에 떨어진 그 런 현실에서 꿈만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이사야’였습니다. 그의 말은 너무나 놀랍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성은 없어 보일 뿐입니다.

     

    모든 통치자들이 허수아비, 땅의 지배자들이 쓸모 없는 사람들, 풀포기와 같아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말리면 강풍에 나는 검불과 같다’ | 이사야 40:23 - 24

     

    여전히 이스라엘의 현실은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세상의 통치자들에 의한 박해와 그로인한 서러움만 더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제국들의 거만한 으스댐을 끝장내버리실, 선지자가 말한 그런 하나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 27b

     

    라고 말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현실은 이다지도 가혹한가?’ 그들처럼, 오늘 우리도 이런 형편에 갇혀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암울해질 때가 많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보았던 무엇이라도 분명히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고난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선명했으면 좋겠고, 악인들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은 ‘도무지 왜?’라는 물음이 끊이질 않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이런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어느 편을 선택해야하는지조차 분명하게 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답답함이 세상 전체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절망과 낙심, 포기와 원망으로 몰아세우는 세상을 사특한 귀신들과 어둠이 장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대단한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서도 성서기자들은 우리와 다른 것을 봅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 이사야 40:31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길을 물으며 나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향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예배의 자리를 포기할 수 없던 이들에게, 어떠한 절망과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제 몫의 선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주실 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 02

    오늘 복음서 말씀에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 시대, 어둠이 사람들 마음을 뒤덮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안에는 짧은 세개의 연속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 (29-31절), 두번째는 해질 녁에 만난 귀신들린 사람들 (32-34절) 그리고 세번재는 새벽에 기도하시는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 (35-39절)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39절 말씀때문에 곧장 ‘전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세가지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것은 모두, 우리가 어떤 현실에 떨어져있는지에 관해서입니다. 세가지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귀신을 쫓아냈다’ 겁니다. 사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떠났다는 첫번째 이야기도 귀신이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성서를 기록했던 당시에는 병을 고치는 일이나, 귀신을 내쫓는 일이 똑같은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같은 시대에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도 병에 걸리면 귀신에 사로잡힌 것이고, 귀신이 떠나가면 병이 낫는다는 생각은 비일비재합니다.

    제임스 티소트(James Tissot, 1836-1902),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다>,&nbsp;1886-94

     

    그리고, 특히 복음서에 귀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보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몸, 영혼, 건강, 인생,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오늘 우리의 세계관은 성서 기자들이나, 초기교회가 살아가던 시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충돌로 인해 움푹패인 거무스름한 달 표면을 보고 ‘방아짓는 토끼’가 산다고 했던 고대인들의 인식이 오늘 우리로서는 터무니 없게 보이겠지만, 과학의 눈으로 관찰하지 못했을 뿐 그런 달의 모습을 그들의 능력안에서 보았다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사람들은 인간의 영,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불행으로 몰아넣는 근본적인 원인을 악한 영의 개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악한 영을 내어쫓는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괜찮은데 왜 나에게 불치병이 찾아오는지, 왜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이 생기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치료법에 급급할 뿐이지, 대체 왜 바이러스가 갑자기 창궐하게 되는지 원인은 모호합니다. 어쩌면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은 끊임없이 질병의 공포속에 살아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들이나,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의 정체를 주목했습니다. ‘귀신’입니다. 노파심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학의 시대에 귀신 운운한다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밖에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을 무조건 ‘귀신’ 현상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건강이 상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경우, 뿐만 아니라 윤리 도덕적인 잘못 마져도 모두 ‘귀신 탓’을 합니다. 하지만 ‘귀신론’을 설파하던 뵈레아 ‘김기동’같은 이단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행동, 생각, 감정이나, 형편이나 상황마져도 ‘영’이나 ‘귀신’을 덧붙이고 떠나가고 기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를 기록했던 사람들의 세계관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과학이나 의학은 인간의 역사의 산물이라고 가볍게 보시면 않됩니다. 지금까지의 이 역사에 동행하시며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발견할 것이냐만 다를 뿐, 성서가 ‘귀신’이라고 부르던 존재들이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귀신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아야 귀신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 03

    지난주일 읽었던 27절의 말씀입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마가복음 1:27

     

    육체나 영혼, 또는 삶을 파괴하는 ’귀신’이라는 존재가 예수님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쫓겨났다’ 이것이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양에게 ‘생명’을 풍성히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파괴하는 귀신을 내쫓는 똑같은 이 일이야말로, 주님이 부르신 제자들에게 맡겨진 일인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귀신과 주님 사이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 삶을 파괴하는 귀신은 곳곳에 있습니다. 모두가 무언가에 휘둘리고 사로잡힌 것처럼 헤어나올 줄 모릅니다. 모두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좌도 우도 돌아보지 않은 채, 미친 듯이 앞을 향해서만 달려 갑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할만큼 뜨악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게 만드는 일도 일어납니다. 잠시 정신이라도 들라치면 그때는 누구라도 괴롭고, 슬프고, 허무합니다. 

    왜, 귀신을 몰아내신 주님이 오셨는데도 귀신은 여전히 활개치고 있는 걸까요? 사실 귀신의 세력들은 예수님이 계셨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한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귀신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귀신에 의해 휘둘리는 세상 뿐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깨지고 상한 모습만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서든 이런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겨보려고 처절한 몸부림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이런 열심을 하면, 저런 사람이 되면, 우리 신앙은 이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애당초 우린 ‘귀신’들이나 그런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들에 의해 처형당하셨는데 우린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형편속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왜 이천년전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러 오셨던 주님께서, 온 땅에서, 아니 적어도 유대땅에서만이라도 귀신을 모두 내어쫓고, 병든 이들을 모두 고쳐내시지 않으셨던 것인지에 대해 먼저 답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복음을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전부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를 보여주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결국 주님에 의해 종말에 드러나고 완성될 겁니다. ‘귀신’과의 싸움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귀신과의 싸움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귀신의 힘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모든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최후의 승리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물론 당연히 ‘귀신’은 우리의 힘이나 방식으로는 내쫓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식으로만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력, 능력이나 승리 같은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약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그 핵심 사건입니다. ‘귀신’은 우리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무기 삼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권력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힘은 파괴하고 죽이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은 억압이나 강요하는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귀신의 권세를 무력하게 무효화시켜버리셨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부활’ 즉 ‘다시 살리는 것’에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명확한 답을 찾고, 귀신의 방해가 없는 형통하고 복된 삶을 원합니다.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저 아무일 없는 어떤 삶이 아니라, 귀신을 제어하고 내어쫓는 일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이것입니다

     

    # 04

    그런데 의문점이 남습니다. 병을 낫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신 뒤의 일입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1:34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귀신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고 다니게 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을까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열광하고 따르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귀신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우리의 기대나 예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이유는 명백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세력을 몰아내고 주님을 믿는 선택은 우리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으로부터 돌이켜 주님께로 향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책임입니다. 믿음은 제 몫의 경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의 존재는 이미 우리 안에 너무나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우리안에 숨어있는 이런 세력과의 싸우려고 하면 무너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가 빛이 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린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모든 어둠을 밝히시는 그분, 예수님께 잇대는 겁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주님께만 닿기만하면 살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만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바울’은 능력에 사로잡힌 성령 충만한 사도였습니다. 그가 지니던 손수건이나 두루고 있던 앞치마를 아픈 사람위에 놓으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갔을 정도입니다. (사도행전 19장12절 ) 하지만, 정작 귀신을 내어쫓거나, 병을 고쳐주는 일은 그에게 아무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 뿐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고린도전서 9:23

     

    ‘복음에 참여한다’는 그의 말은 ‘전도’나 ‘선교’처럼 ‘어떤 그분의 일’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이신 예수님께 사로잡히고, 전적으로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로 누리며 살아가는 그것일 뿐입니다. 언제나 ‘복음’이 주체고 ‘사람’은 객체일 뿐입니다. 주님에 의해, 주님이 행하시는 ‘사건’일 때만 ‘복음’은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신 예수님께 잇대어, 오직 그분안에서, 그분을 통해 생명의 풍성함과 기쁨을 발견해내는 길 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때로 피곤에 지쳐 쓰러지기도 합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넘어지고, 귀신에 의해 병들기도 합니다. 그럴때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낙망과 절망에 떨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온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29)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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